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사레 보르자 (문단 편집) == 그 외 일화 == 아내와 결혼한 뒤 딱 일주일 동안만 만나고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았다는 야사가 있다. 하지만 [[역사학자]]가 쓴 [[http://web.archive.org/web/20140813191711/http://book.daum.net/detail/book.do?bookid=KOR9788993178005|체사레 평전]]을 보면 실제로는 [[프랑스]]에서 3개월간 아내와 함께 살았고, [[이탈리아]]로 아내를 데려가려 했으나 [[프랑스]] 왕이 아내를 인질로 잡아두어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한다. 그때 [[임신]]한 건지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. 그 외에도 11명의 사생아가 있다고 한다. 이 중 헤로니모(지롤라모)라는 서출 자식은 부친인 체사레의 성격을 물려받았고, 아버지가 [[이탈리아]]에 축출된 후 [[고모]]인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의 비호를 받았는데, 당시 그 와중에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페라라인 암살자들을 끝까지 추격해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. 여동생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와 [[근친상간]]을 했다는 의혹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는데, 이는 [[율리오 2세]]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새로운 의혹[* 보르자 가문 몰락 후 [[바티칸]]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에 관해 갑자기 소문이 빠르게 번졌던 것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.]이 있으며[* 즉위하자마자 위의 각주에 달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데에서 알 수 있지만, 알렉산데르 6세와 보르자 가문을 증오하다 못해 혐오한 율리오 2세는 알렉산데르 6세를 가까이에서 섬긴 시종들을 체포해 고문, 그의 기독교 수장으로서의 잘못(성직 매매나 족벌주의 등)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린 자백을 받아냈으며 알렉산데르 6세가 한 적도 없는 암살이나 독살~~그리고 삥뜯기~~에 대한 자백마저 받아냈다.], [[남색]]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. 다만 체사레의 경우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에 대한 감정은 사실인 듯하다.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에 따르면, 정설과 달리 반노차는 체사레의 친모가 아니라 양어머니라고 주장하고, 체사레는 양어머니인 반노차를 이상적인 여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딸인 [[루크레치아 보르자]]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. 이 설을 따른 만화가 [[칸타렐라]]. 그런데 이 사람의 행적을 짚어가다 보면 [[모녀덮밥]], 모자덮밥, [[형제덮밥]], [[자매덮밥]], [[네토리]][* [[베네치아 공화국]] 고관에게 시집가는 아가씨를 신행길에 납치 강간하고 자기 첩으로 삼았다. 해당 여성은 체사레가 율리오 2세에게 체포될 때까지 체사레에게 붙잡혀있다가 체사레 몰락 후에 원래 시집가기로 되어있던 남편에게 반환되어 결혼했다고.], 심지어 부자덮밥까지… 물론 체사레의 행적을 다루는 역사의 사료대로 치정 행각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밤새 토론만 했던 관계일 수도 있다. 한때 [[레오나르도 다 빈치]]를 군사고문으로 영입하여 신무기와 요새를 설계하게 했다.[* 후원자 없이 실업자 신세였던 다빈치가 제 발로 찾아와 '''"당신을 위해 제 재능을 바치고 싶습니다."'''했던 것. 비범한 인물은 비범한 인물을 알아보는 것인지 체사레는 머지않아 다빈치를 '''"나의 [[아르키메데스]]"'''라고 높이 평가했고, 자신의 영토 내에 지어지고 있거나 지어질 예정인 건축물을 감독하려는 목적이라면 어디든 마음대로 다녀도 된다는 허가증을 써주기까지 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